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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붐이 한창일 때, 저도 처음엔 엔비디아 주가 차트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AI 툴을 업무에 써보면서 문득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시스템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기를 먹고 돌아가는 걸까? 피터 틸이 6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약 5,000억 원 규모의 포트폴리오를 공개했을 때, 그 안에서 제 오래된 의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습니다.
에너지 밸류체인 전체를 산 남자
피터 틸은 페이팔 공동 창업자이자 팔란티어 창업자, 그리고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자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개인 자산을 운용하는 '틸 매크로(Thiel Macro)'라는 회사가 SEC에 13F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여기서 그의 상장 주식 투자 내역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13F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분기별로 제출하는 기관 투자자 보유 주식 보고서입니다. 쉽게 말해 "나는 이런 주식을 이만큼 가지고 있다"고 공개하는 서류입니다.
총 4억 1,800만 달러(약 5,000억 원)의 자금이 단 8개 종목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 포트폴리오 구성을 봤을 때 예상 밖이었습니다. AI 시대에 반도체 기업이나 소프트웨어 플랫폼 하나 없이, 아마존 한 종목(28%)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에너지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에너지 투자가 단순히 특정 기업에 몰빵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원료를 생산하는 Vistra(18%)와 소형 원자로 기업 X-Energy(15%)부터, 전력을 실제 수요처까지 공급하는 송전 회사들, 그리고 전기를 가장 많이 쓸 데이터센터의 대명사 아마존까지. 전기가 발전소에서 데이터센터 서버에 닿기까지의 밸류체인(Value Chain) 전체를 촘촘하게 매수한 구조였습니다. 밸류체인이란 원자재 생산부터 최종 소비자 도달까지 가치가 더해지는 전 과정을 뜻합니다. 제가 AI 비즈니스 구조를 공부하면서 "전력이 핵심 병목"이라고 느꼈던 직관을 이 포트폴리오가 그대로 숫자로 증명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 Vistra (18%): 전력 원료·발전 담당
- X-Energy (15%): 소형 모듈 원자로(SMR) 기술 기업
- AEP, FE, DT, CMS (각 10%): 오하이오·미시간 지역 송전 담당 규제 유틸리티
- 아마존 (28%): AI 데이터센터 수요의 최정점
오하이오·미시간에 숨어 있는 규제 유틸리티의 비밀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먼저 든 질문이 있었습니다. 왜 하필 오하이오와 미시간의 송전 회사들일까? AEP, FirstEnergy(FE), DTE Energy(DT), CMS Energy(CMS), 이 네 곳은 모두 규제 유틸리티(Regulated Utility) 기업입니다. 규제 유틸리티란 특정 지역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아 독점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대신, 요금과 수익률도 정부의 통제를 받는 기업을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요금을 올릴 수 없는 대신, 투자한 자산 규모(레이트베이스)에 허용 수익률을 곱한 만큼의 이익이 사실상 보장되는 구조입니다.
레이트베이스(Rate Base)란 규제 유틸리티가 전력망 구축·유지에 투자한 자산의 총규모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얼마나 많이 깔았느냐"가 곧 "얼마를 버느냐"를 결정하는 셈입니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면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그에 맞춰 전력망에 투자해야 하니 레이트베이스가 커지고, 결국 허용 이익도 자동으로 늘어납니다.
그렇다면 왜 오하이오와 미시간인가? 미국 데이터센터의 수도라 불리던 버지니아 북부는 이미 포화 상태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반면 오하이오와 미시간은 저렴한 토지, 냉각에 유리한 서늘한 기후, 그리고 풍부한 수자원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데이터센터 입지 선정에서 이 세 조건은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출처: Data Center Dynamics). 피터 틸이 네 회사에 각각 정확히 10%씩 동일 비중으로 투자한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정 기업의 우위를 점치기보다는 "이 지역 자체가 성장한다"는 데 베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은 종목 선택 리스크를 줄이면서 지역적 성장이라는 큰 방향에 올라타는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아마존이 유일한 기술주인 이유
포트폴리오에서 에너지가 아닌 기술 기업은 아마존 단 하나입니다. 왜 구글도, 마이크로소프트도 아닌 아마존이었을까요? 제가 직접 분석해보니 이유가 꽤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아마존의 핵심 성장 동력은 AWS(Amazon Web Services)입니다. AWS는 최근 매출 성장률이 바닥을 찍고 다시 상승 사이클에 진입한 상태로, AI 워크로드와 기존 클라우드 서비스 모두에서 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자체 반도체 사업입니다. 아마존이 개발한 트레이니움(Trainium)과 그래비톤(Graviton) 칩은 연간 250억 달러 매출에 세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 중입니다. 트레이니움은 AI 모델 훈련용, 그래비톤은 일반 클라우드 연산용으로 각각 최적화된 자체 설계 칩입니다.
아마존의 전략이 영리한 이유는 이 자체 칩을 AWS 고객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끼워팔기 구조에 있습니다. 처음엔 저렴하게 쓰다가, 아마존의 소프트웨어 환경에 최적화되다 보면 이탈하기 어려워지는 락인(Lock-in) 효과가 생깁니다. 락인이란 특정 플랫폼에 한번 깊이 연동되면 전환 비용이 높아져 고객이 떠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앤트로픽(Anthropic)과 OpenAI가 대규모 컴퓨팅 계약을 아마존과 체결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출처: AWS 공식 사이트).
밸류에이션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미래 매출 대비 주가 배율인 PSR(Price-to-Sales Ratio) 기준으로는 과거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미래 순이익 대비 주가 배율인 PER(Price-to-Earnings Ratio) 기준으로는 과거 대비 저평가 구간에 있다고 분석됩니다. 수주 잔고인 RPU(Remaining Performance Obligation)가 4,960억 달러로 전년 대비 154% 급증했다는 점도 미래 매출 가시성을 높여주는 근거입니다. RPU란 이미 계약은 됐지만 아직 매출로 인식되지 않은 잠재 수익의 총합을 의미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피터 틸의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따라 사도 될까요?
A. 틸 매크로 펀드의 규모는 약 4억 달러로, 피터 틸 전체 순자산(약 320억 달러)의 1~2%에 불과합니다. 공개된 13F에는 비상장 주식, 파생상품, 원자재 숏 포지션 등이 포함되지 않아 전략의 일부만 보이는 셈입니다. 방향성을 참고하되, 맹목적으로 복사하는 것은 리스크가 따를 수 있습니다.
Q. 규제 유틸리티 주식은 어떤 상황에서 리스크가 발생하나요?
A. 데이터센터가 오하이오·미시간으로 이전하지 않거나, 빅테크 기업들이 차세대 저전력 칩을 개발해 전력 수요 급증세가 예상보다 꺾일 경우 이 투자는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습니다. 또한 AI 수익 모델이 불분명해져 인프라 투자 속도가 전반적으로 조절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Q. 왜 하필 원자력 기업 X-Energy에 투자했을까요?
A. 소형 모듈 원자로(SMR) 기술은 기존 대형 원전 대비 건설 기간이 짧고 데이터센터 인근에 설치하기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이고 탄소 없는 전력 공급원으로 SMR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며, 전력 원료 단계부터 밸류체인을 장악하려는 전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Q. 아마존의 RPU 4,960억 달러는 어떤 의미인가요?
A. RPU(Remaining Performance Obligation)는 계약은 완료됐지만 아직 매출로 인식되지 않은 잠재 수익의 합계입니다. 쉽게 말해 "앞으로 들어올 예약된 매출"인데, 이것이 154% 급증했다는 건 AWS의 미래 성장 가시성이 그만큼 높다는 신호로 해석됩니다.
결론
피터 틸의 포트폴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꽤 오랫동안 화면을 들여다봤습니다. AI 관련 투자라면서 반도체 기업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되려 더 강렬한 메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골드러시 때 곡괭이를 판 사람이 더 컸다는 교훈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발전-송전-수요에 이르는 에너지 밸류체인 전체를 지도처럼 펼쳐놓은 포트폴리오를 보니 "길목을 선점한다"는 말이 이런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전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AI 수익 모델 미증명, 전력 효율 기술의 등장, 데이터센터 지역 이동 계획 변경 등의 리스크는 분명 존재합니다. 제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거장의 포트폴리오는 복사가 아니라 프레임워크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너지 인프라라는 큰 방향성에 공감한다면, 자신의 자금 상황과 리스크 허용 범위 안에서 비중을 조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